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생애 (문단 편집) == [[레퀴엠(모차르트)|진혼곡]] == 1788년에 모차르트 부부는 빈 중심가의 임대주택을 떠나 빈 교외의 알체그룬트(Alsergrund)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1789년에는 돈벌이를 위해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만하임]]을 비롯한 독일지역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목표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다만 이 여행을 통해[* 여행 덕분인지는 사실 불확실하다.] 그는 [[헝가리 왕국|헝가리]]나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의 귀족들에게 후원을 약속받고 그들에게 곡을 써주기로 했으며 이 후원금으로 드디어 그는 그간 늘어만 가던 채무의 변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1791년부터는 창작의욕도 다시 회복되어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레오폴트 호프만의 후임으로 성 슈테판 성당의 카펠마이스터로 낙점되어 그의 경제 상황도 좋아질 조짐을 보였다.[* 이 시기에 쓰여진 유명한 종교음악이 찬송가 Ave Verum Corpus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희망을 보여준 1791년이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다는 것. 1791년 9월 6일 모차르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자 요절한 요제프 2세의 후임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 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축제에 맞추어 [[프라하]]에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상연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을 얻어 상당한 고열에 시달렸다.[* 당시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의 작곡 주문을 받은 상태에서 진혼곡을 작곡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2달도 남지 않은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에 맞춰 상연할 오페라 주문을 또 받았다. 제아무리 천재라도 이런 강행군에서는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다.] 모차르트는 아픈 몸을 돌볼 새도 없이 9월 30일에는 빈에서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가 된 <마술피리>를 초연 했다. <마술피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와 별도로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레퀴엠(모차르트)|진혼곡]]의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이 진혼곡은 당시 28살의 젊은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크(Franz von Walstegg) 백작이 거액을 주고 20살에 죽은 자기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 발제크 백작은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으로 사칭하여 발표하려고 했다. 거액을 준 이유도 자신의 의도를 작곡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를 필사하여 1793년 12월 자신의 지휘로 연주를 했다고 하는데, 이 때 자신의 작품으로 사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곡의 초연 자체는 1793년 1월에 이미 이루어졌다.] 모차르트는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당겨받고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해 달라는 독촉을 받았는데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작곡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모차르트는 11월 20일에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설사와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고, 아내와 처제(조피)가 그를 간호하고 가족 주치의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차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1791년 12월 5일 진혼곡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진혼곡은 결국 자신을 위한 곡이 되어 버린 셈. 모차르트 사망에 관한 이야기는 [[모차르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미완성 상태인 진혼곡을 완성시키는게 급선무였다. 의뢰인으로부터 이미 계약금의 절반을 받았는데 이를 완성시키지 못하면 되돌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일이 촉박했던 그녀는 먼저 모차르트의 제자 요제프 레오폴트 아이블러(Joseph Leopold Eybler, 1765~1846)에게 의뢰하였으나 아이블러는 [[Dies irae]]와 Confutatis의 오케스트레이션 일부와 Lacrimosa를 조금 손댄 뒤 포기했다. 이에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또 다른 제자였던 프란츠 쥐스마이어(Franz Suessmayer,1766~1803)에게 의뢰하였으며 결국 그가 이 진혼곡을 완성하였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있었으며 이 곡의 작곡 방향에 대해서 나름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Sequentia와 Offertorium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으며 Lacrimosa 이후의 Sanctus, Benedictus, Agnus Dei는 쥐스마이어 자신이 작곡했다고 한다. 이렇게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는 표지에 모차르트의 사인을 위조하여 기입한 후 의뢰인이었던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의 스케치나 모차르트가 생전에 레퀴엠의 작곡을 위해 연주하던 것을 듣고 기억하여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레퀴엠의 끝곡인 Communio는 곡의 첫 부분인 Introitus와 [[자비송|Kyrie]]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차르트의 지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라크리모사 이후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부분은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나 연주자들에 의한 수정보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쥐스마이어판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더 자세한 것은 따로 진혼곡 항목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version=1338, paragraph=3)] [[분류: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